원 태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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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 태정제는 원나라의 황족으로, 1323년 남파의 변으로 영종이 살해된 후 몽골 고원에서 대칸으로 즉위했다. 그는 중국 황제로서 유교적 전통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무슬림과 몽골 관료들이 주요 직책을 차지했다. 재위 기간 동안 18개의 부서로 제국을 나누고 라마승의 중국 입국을 금지하는 등 정책을 펼쳤지만, 1328년 사망 후 아들 아라기박이 즉위했으나 내전으로 폐위되었고, 그의 묘호와 시호는 추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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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태정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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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예순 테무르 |
중국어 이름 | 也孫鐵木兒 |
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일본어 이름 | イェスン・テムル |
통치 | |
칭호 | 몽골 제국 제10대 황제 (카안), 원나라 제6대 황제 |
재위 기간 | 1323년 10월 4일 – 1328년 8월 15일 |
즉위일 | 1323년 10월 4일 |
연호 | 태정(泰定) 1324–1328 치화(致和) 1328 |
전임자 | 게겐 칸 시데발라 |
후임자 | 라기바흐 칸 |
생애 | |
출생 | 1293년 |
사망 | 1328년 8월 15일 |
사망 장소 | 상도, 원나라 |
아버지 | 감말라 |
어머니 | 부얀 켈미시 (옹기라트) |
배우자 | 바부칸 카툰 (옹기라트 씨족) |
가계 | |
왕조 | 보르지긴 가문 |
자녀 | 아리기바 |
기타 | |
묻힌 곳 | 기련곡 (몽골 고원) |
2. 생애
원나라의 제6대 황제이다. 쿠빌라이 칸의 증손자이자 황태자 친김의 손자이며, 진왕 카말라의 아들이다. 이름은 '''예순 테무르'''(ᠶᠡᠰᠦᠨ ᠲᠡᠮᠦᠷ|Yesün Temürmn)이며, 몽골어로 '아홉 개의 철 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1276년 설과 1293년 설이 존재하나 기록이 엇갈린다.[29]
아버지 카말라가 사망한 1302년 이후 진왕 작위를 계승하여[17][2][3] 몽골 고원의 광대한 영지와 강력한 군대를 기반으로[18][2] 유목 세력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부상했다.[17][2] 그는 중앙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몽골 고원에서 세력을 다지는 데 주력했으며, 무종, 인종, 영종 재위 기간 동안 존경받는 왕족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2][30]
1323년 어사대부 테크시 등이 영종 시데발라를 암살한 남파의 변 이후, 혼란 속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다.[17][19] 그는 정변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으며[2], 같은 해 9월 4일 케룰렌강 유역에서 즉위했다.[19] 즉위 직후 연호를 '''태정'''(泰定)으로 바꾸고, 자신을 옹립했던 남파의 변 주동자들을 숙청하여[5][21] 권력 기반을 다졌다.
재위 기간 동안 유교 전통 존중을 표방했으나[9], 실제로는 다울리트 샤 등 무슬림과 몽골 출신 측근들을 중용하여[10] 한족 관료들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또한 몽골 상인들과의 유착이 심화되었고[11], 라마승들의 월권 행위가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13] 잦은 자연재해와[23] 민심 불안 속에서 일부 개혁 시도는 있었으나[24]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28년 8월 15일, 여름 수도 상도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13] 그의 사후 측근 세력이 어린 아들 라기바흐를 황제로 옹립했으나, 엘테무르 등이 무종 카이샨의 아들 투그 테무르를 추대하며 두 개의 수도 전쟁이 발발했다. 결국 라기바흐 정권은 패배하고 문종 투그 테무르가 즉위하면서[26] 예순 테무르는 방계 황제로 간주되어 묘호와 시호를 받지 못하고 연호를 딴 '''태정제'''(泰定帝)로 불리게 되었다.
2. 1. 어린 시절
세조 쿠빌라이 칸의 황태자 친김의 아들인 카말라(甘麻剌)의 아들이다. 출생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지원 30년(1293년) 음력 10월, 막북(漠北) 초원의 용허하(龍居河, 현 케룰렌강) 강변 진왕부(晋王府) 잠저에서 태어났다는 설이다.[29] 다른 하나는 『원사』 태정제본기 1권에 기록된 것으로, 지원 13년(1276년) 10월 19일(1276년 11월 26일)에 태어났다는 설이다.[29] 하지만 『원사』 태정제기 2권에는 1323년에 3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庚午,帝崩,壽三十六), 이를 따르면 출생 연도가 달라진다. 만약 1293년생 설을 따른다면, 그가 1300년경부터 아버지 카말라를 따라 오고타이 칸국의 카이두 군대와 교전했다는 『원사』의 다른 기록과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그의 이름은 이손철목아(也孫鐵木兒) 또는 이손특목이(伊遜特穆爾)로 불렸으며, 당시 몽골어로는 '아홉 개의 철 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그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증손자이자, 황태자 친김의 손자이며, 성종 테무르와는 사촌 관계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증조부 쿠빌라이 칸이 아직 생존해 있었다.[29]
아버지 카말라는 친김의 장남이었으나, 칭기즈 칸의 유훈을 잘 외우지 못하고 말솜씨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후계 경쟁에서 동생 테무르와 다르마발라에게 밀려났다. 1292년[2][3] (혹은 1291년) 진왕(晉王)으로 임명되어 몽골 고원의 방비와 칭기즈 칸의 4대 오르도 관리를 맡았으나, 중앙 정치에서는 점차 소외되었다. 카말라는 1302년 2월 8일에 사망했다.
카말라가 사망하자, 예순 테무르가 진왕 작위를 계승했다.[17][2][3] 그는 아버지로부터 몽골 고원의 광대한 영지와 강력한 군대를 물려받았고,[18][2] 이를 바탕으로 몽골 고원 유목 부족들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부상했다.[17][2] 이후 쿨루그 칸, 아이유르바르와다, 게겐 칸의 치세 동안 예순 테무르는 조정에서 가장 존경받는 왕자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2]
『원사』와 『신원사』에는 예순 테무르의 구체적인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상세히 전하지 않는다.
2. 2. 몽골고원 방어 활동
1300년 아버지 카말라를 따라 군사를 이끌고 몽골고원에서 오고타이 칸국의 카이두와 차가타이 칸국 두아의 군대와 교전하였다. 당시 아버지 카말라는 만년에 병을 얻었음에도 주변의 권고를 무릅쓰고 몽골고원 방어 임무를 계속 수행하고 있었다.1302년 2월 8일, 아버지 카말라가 대덕 6년에 사망하자[17] 어린 예순 테무르가 진왕(지논)의 작위를 계승하여 북방의 방비를 맡게 되었다.[17] 이로써 그는 몽골고원에 광대한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18] 고원 내 유목민 부족들을 대표하는 유력 제왕으로 부상했다.[17] 또한 1309년(지대 2년)에는 운남에 주재하던 서형(庶兄) 또는 동복 친동생인 양왕(梁王) 숭샨마저 사망하면서, 예순 테무르는 카말라 왕가의 적통 계승자이자 막북파(漠北派)를 대표하는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원사에 따르면 그는 정성스럽게 황제를 받들어 추대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막북에 머물면서도 대도의 정세 변화를 면밀히 주시했으며, 진왕부에 있을 당시 내사성에 무슬림 다울리트 샤 등을 기용하여 자신의 측근 세력을 구축했다.
무종, 인종, 영종 재위 기간 동안 예순 테무르는 몽골고원에 주둔하며 강력한 군대를 유지했고, 존경받는 왕족이자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30] 1312년 2월에는 인종으로부터 남강로의 6만 5천 호를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며, 인종의 명을 받아 요동 지역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중앙의 제위 계승 분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몽골고원에서 자신의 세력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지치 3년(1323년), 어사대부 테크시 등이 영종 시데발라와 승상 바이주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몽골고원의 강력한 유목 세력을 통솔하는 예순 테무르를 새로운 칸으로 옹립하고자 했다.[17] 테크시는 톨 강 유역에 주둔하고 있던 예순 테무르에게 밀사를 보내 칸위에 오를 것을 요청했다.[19] 예순 테무르는 이 밀사를 구속하고 즉시 시데발라에게 암살 계획을 알리려 했으나, 계획 발각을 두려워한 테크시 일파는 예순 테무르의 답신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시데발라와 바이주를 살해했다.[19][20] (남파의 변) 이후 칸의 인장과 옥새 등이 예순 테무르에게 전달되었고, 같은 해 9월 예순 테무르는 케를렌 강 유역에서 황제 즉위를 선언했다.[19]
2. 3. 남파지변과 즉위
원나라 진왕(晉王) 시절, 예순테무르는 아버지 가마라의 뒤를 이어 몽골 고원에 광대한 영지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18] 몽골 고원 유목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 잡았다.[17] 그는 쿠빌라이 칸 사후 테무르와의 황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난 아버지 가마라와 달리, 중앙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몽골 고원에 주둔했다.1323년 3월, 영종 시데발라가 추진하던 숙청 정책에 불안감을 느낀 일부 신하들이 예순테무르에게 연락하여 위험을 경고했다. 같은 해 8월 2일, 예순테무르는 영종 암살 및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려는 계획이 진행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몽골고원을 떠나 대도로 향했다. 일각에서는 예순테무르가 이 쿠데타 계획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설도 제기된다.
1323년 8월 4일, 어사대부 테그시, 친투무르 등은 옹기라트부 출신 권신 테무데르의 세력을 등에 업고, 아수드 및 알란인 병사들을 동원하여 상도에서 대도로 이동 중이던 영종의 행렬을 남파(상도 남쪽 15km 지점)에서 기습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영종과 승상 바이주가 살해되었는데, 이를 남파의 변이라고 부른다. 쿠데타에는 테그시 세력 외에도 킵차크 한국 출신 칸트부크, 영종의 숙청을 두려워하던 조정 관료들, 그리고 안서왕 아난다의 아들 예루테무르를 비롯하여 인종 아유르바르와다 집권기에 숙청되었던 왕족의 후예들 다수가 가담했다. 반란 세력은 예순테무르의 즉위를 지지했으며, 예순테무르의 측근인 다울라트 샤가 사전에 테그시 측과 접촉하여 교섭했다는 기록도 있다.
정변 소식을 접한 예순테무르의 반응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원사 등 공식 기록에 따르면, 예순테무르는 테그시가 보낸 사자를 붙잡아 영종에게 급히 알리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고 한다.[4] 다른 기록에서는 테그시의 밀사가 먼저 도착해 즉위를 권유하자 예순테무르가 이를 거절하고 밀사를 구속했으며, 계획 누설을 우려한 테그시 등이 서둘러 영종을 살해했다고도 전한다.[19][20] 어느 쪽이든 예순테무르는 남파의 변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인물이며, 정변에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2]
영종이 살해된 후 황제의 옥새 등이 예순테무르에게 전달되었고,[19] 그는 1323년 9월 4일(일부 기록에는 10월 4일[2]) 몽골의 케룰렌강(당시 용거하) 유역에서 대칸으로 즉위했다.[19] 그는 자신의 강력한 정치적 기반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31]
즉위 직후 예순테무르는 영종의 측근 세력을 숙청했다. 10월에는 군대를 대도로 보내 자신의 즉위를 공식화하는 한편, 반대 세력을 제거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쿠데타 세력의 꼭두각시가 되거나 찬탈자라는 비난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자신을 옹립했던 테그시, 에센 테무르 등 남파의 변 주동자들에게 영종 시해의 책임을 물어 처형하는 등 숙청을 단행했다.[5][21] 정변에 가담했던 다른 왕족들도 윈난성, 하이난 등지로 유배되었다. 11월 13일, 예순테무르는 대도에 입성하여 황제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이후 일부 관료들이 테무데르와 테그시의 잔당까지 모두 숙청할 것을 건의했지만, 예순테무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6] 그는 사면령을 발표하여 남파의 변과 관련되어 처형된 이들의 재산을 가족에게 돌려주도록 조치했다.[7] 이듬해 초에는 아들 아리가바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선대 인종이 형 무종 카이샨의 아들들에게 제위를 물려주기로 한 약속이 있었으나, 당시 카이샨의 아들들이 멀리 유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순테무르가 큰 저항 없이 황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22]
2. 4. 즉위 이후
1323년, 시데바라 개게안 칸(영종) 암살 이후 예순 테무르는 칸위에 올랐다. 비록 암살 음모 연루 의혹이 있었으나[2], 즉위 직후 관련자들을 처형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5]찬탈이라는 정통성 약점 때문에 그는 폭넓은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다. 중국 황제로서 한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유교 전통 존중을 표방했지만[9], 실제 통치에서는 다울리트 샤 등 무슬림 및 몽골 출신 측근들을 중용하여[10] 한족 관료들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또한 몽골 상인들과의 유착 관계가 심화되어 기독교도와 무슬림 상인들에게 특혜를 부여했다.[11] 예순 테무르 자신은 궁정의 사치를 비판하기도 했으나[11], 재위 기간 동안 지진, 홍수, 가뭄 등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했고[23], 장규 등 일부 관료의 개혁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4]
사회적으로는 라마승들의 월권 행위가 문제가 되자[13], 결국 이들의 중국 입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몽골의 전통적인 텡그리 신앙에는 소홀한 모습을 보였다.[13] 행정적으로는 제국을 18개의 부서(성, 省)로 나누어 통치하는 개편을 실시했으며, 외교적으로는 1326년 금장 칸국의 우즈베크 칸과 선물을 교환하며 관계를 유지했다.[12]
1328년 8월 15일, 예순 테무르는 여름 수도 상도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13] 그의 사후 측근 세력은 어린 아들 라기바흐를 칸으로 옹립했으나, 이에 반발한 무종계 세력이 두 개의 수도 전쟁(천력의 내란)을 일으켰다. 결국 라기바흐 정권은 3개월 만에 투그 테무르에게 패배하며 붕괴되었다.[26] 예순 테무르는 사후 정권 붕괴와 방계 황제라는 이유로 한족식 묘호나 시호를 받지 못했다.
2. 4. 1. 즉위 초반
1323년, 시데바라 개게안 칸(영종)이 대사 테그시와 에센 테무르에게 암살당하자, 반역 세력은 어머니가 옹기라트 씨족 출신인 예순 테무르를 새로운 칸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원사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예순 테무르는 테그시의 사자 왈루스를 붙잡아 영종에게 암살 음모를 알리려 했으나 사자가 너무 늦게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 그러나 예순 테무르는 이 음모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인물이었으며, 정변에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2] 그의 측근인 다울리트 샤가 음모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도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한다.음모자들이 보낸 황제의 옥새를 받은 예순 테무르는 1323년 10월 4일 몽골의 케를렌 강 북쪽 기슭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는 에센 테무르를 우승상으로, 테그시를 군기감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암살 사건의 공모자로 의심받을 것을 우려하여, 돌연 정책을 바꿔 테그시, 에센 테무르 등 암살 관련자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고위 관료였던 창 궤 등은 예순 테무르에게 즉위를 받아들이고 음모자들을 처벌하라는 서신을 보냈다.[5] 예순 테무르는 대도와 상도에 군대를 보내 반란에 가담한 장교들을 처형했는데, 이는 그들이 자신을 꼭두각시 황제로 만들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다섯 명의 왕자는 윈난성, 하이난성 등 먼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중국인 관료들은 테무데르와 테그시의 잔당 및 그 가족들까지 숙청 범위를 확대할 것을 거듭 요청했지만, 예순 테무르는 이를 거부하였다.[6] 그는 사면령을 발표하고, 처형된 음모자들의 몰수된 재산을 그 가족들에게 돌려주었다.[7]
대도에 입성한 예순 테무르는 대명전(大明殿)에서 제왕과 백관들의 조하(朝賀)를 받으며 황제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그는 부왕 카말라를 현종(顯宗)으로 추존하였다. 중국 황제로서 중국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 통치 초기부터 유교적 전통에 대한 존중을 표명하였다.[32] 동시에 진왕 시절 자신의 측근이었던 무슬림 다울리트 샤를 중서령에 임명하였고, 몽골에서 그와 함께 온 무슬림 및 몽골인 관리들을 정부 요직에 배치하였다. 1323년 12월 24일에는 연호를 태정(泰定)으로 바꾸었다. 태정 원년(1324년) 3월에는 휘정원(徽政院)을 폐지하였고, 4월 14일에는 아내 바부칸(八不罕)을 황후로, 장남 아라기박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그의 치세 초반은 순탄치 않았다. 즉위 첫 해인 1324년 중국 전역에서 지진, 폭우, 가뭄, 황충 피해, 흉년 등이 잇따라 발생했지만[23] 효과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같은 해 여름에는 황하 하류가 범람하여 대규모 홍수와 기근이 발생했고, 이는 결국 민중 봉기로 이어졌다. 봉기는 곧 진압되었지만, 원나라 군대는 게릴라전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민간에서는 자발적인 민병대가 조직되는 등 원나라 내부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개기일식과 혜성이 관측되면서 당시 중국인과 몽골인들 사이에 큰 불안감을 야기하며 사회는 혼란스러워졌다[23]. 예순 테무르는 조정 대신들에게 이러한 재앙과 이상 현상의 원인을 물었고, 평장정사 장규는 테그시 일파 잔당 처벌, 과도한 재물을 요구하는 궁정 내 승려와 도사 추방, 불필요한 관료 정리, 광둥에서의 진주 채취 중단 등을 건의했으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24].
태정 2년(1325년) 태정제는 황궁의 재물을 조사하고 국고 지출을 줄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해 7월에는 한인(漢人)들이 병장기를 소지하거나 보관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한인들로부터 무기를 압수하는 명령을 발표하였다. 9월에는 전국을 18개의 도(道)로 나누는 행정 구역 개편을 실시하였다. 또한 당시 사회 문제가 되었던 라마승이나 도교 도사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토지 매입을 단속하고 요역을 부과하는 등의 정책을 내놓았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2. 4. 2. 치세 중반

태정제의 치세는 원나라 중기의 혼란 속에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시기였으나[25], 몽골 본토와 영하(寧夏), 강회(江淮) 등지에서 천재지변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소수민족의 움직임도 계속되어 사회 내부의 모순은 점차 깊어지고 있었다.
태정 2년(1325년) 6월, 하남행성 식주(息州)에서는 백성 조추시(趙醜廝)와 곽보살(郭菩薩) 등이 '미륵불(彌勒佛)이 마땅히 천하를 가질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다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하남 지역은 금나라 말기부터 원나라 초기에 이르는 전란의 주요 무대였고, 이후에도 황하의 잦은 범람과 원 왕조의 가혹한 수탈로 인해 피폐해진 상태였다. 이 미륵불 유언비어 사건은 이러한 불안정한 민심을 반영하는 동시에, 훗날 백련교 봉기의 근거지가 되는 하남에서 나타난 원나라 말기 민중봉기의 초기 징후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지방 관리들과 부족장들은 황제가 존경하는 라마승들이 법을 심각하게 어기고 백성들을 괴롭힌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일부 라마승들은 민가에 침입하여 집주인을 내쫓고 부녀자를 희롱하는 등 행패를 부렸으며[13], 이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과 두려움이 커지자 예순테무르는 결국 라마승의 중국 입국을 금지시켰다.
예순테무르는 엄격함보다는 관용을 택하는 경향이 있어 정치 기강이 점차 해이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주와 관료들은 궁정의 신임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고 가난한 백성들의 땅을 빼앗았으며, 각지에서는 도적이 들끓어 약탈을 일삼았다.
장기간 북방에서 성장하여 중앙 정계에 익숙하지 않았던 태정제는 한족(漢族) 출신 관료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그는 중서성 좌승상 다울라트 샤를 비롯한 색목인 측근들을 행정, 감찰, 군사 등 여러 분야의 요직에 중용하고 몽골 귀족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통해 정권 기반을 유지했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인종과 영종 시대에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추진되었던 정책 방향과는 거리가 먼 보수적인 노선으로 평가받는다. 다울라트 샤 외에도 우바이다울라, 바얀차르 등 무슬림 출신 관료들이 중서성의 주요 직책을 맡았으며, 마훔드 샤와 하산 호자는 군사 관련 기관인 군기감을 관리했다. 반면 한족 관료들의 행정 참여는 상대적으로 미미했다.[10] 몽골 상인들과의 유착 관계는 예순테무르 시기에 절정에 달했으며, 그의 정부는 기독교도와 무슬림 상인들에게 각종 부역 의무를 면제해주고, 몽골 귀족들이 사치품 구매 대가로 약속한 막대한 지불을 보장해주었다.[11]
그의 통치 아래 무슬림 세력이 다시 성장하여 여러 모스크가 건립되었다. 동시에 그는 유교를 박해하라는 요구는 거부했으며[9], 몽골의 전통적인 텡그리즘이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13]
한편, 평장정사 장규(張珪)는 테크시 일파 잔당 처벌, 궁중 내 승려와 도사 추방, 불필요한 관리 감축, 광동(廣東)에서의 진주 채취 중단 등을 골자로 하는 시정 개혁안을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4] 예순테무르 칸 자신도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궁정에서 외국 상인들로부터 수입한 값비싼 보석을 사들여 사치를 부리는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11] 1326년에는 금장 칸국의 우즈베크 칸이 치타를 선물로 보내오자, 예순테무르는 금, 은, 현금, 비단 등으로 답례하기도 했다.[12]
재위 기간 동안 예순테무르는 제국의 행정 구역을 기존의 12개 단위에서 "성의 군주(省의 君主)"라 불리는 위원회가 통제하는 18개의 부서(성, 省)로 나누어 통치했다.
2. 4. 3. 생애 후반
북방 영주 세력의 추대로 칸위에 올랐지만, 그를 보좌할 만한 능력과 학식을 갖춘 인물이 주변에 부족하여 지지 기반이 취약했다. 그는 전국을 18개의 지방으로 나누어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한편, 지방 영주와 유력 세력 중심으로 지방을 다스리게 했다.
찬탈을 통해 즉위했기 때문에 예순 테무르는 폭넓은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 중국 황제로서 한족(漢族)의 지지를 얻기 위해 즉위 초부터 유교 전통 존중의 자세를 보였다.[9] 그러나 실제로는 무슬림 및 몽골 출신 관료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했다. 쿠메이질과 타스 테무르가 우승상을, 다울라트 샤가 중서성(中書省) 행정관, 감찰어사, 좌승상을, 안다추가 군기감 행정관을 맡는 등[10] 무슬림 관료들이 중용되었다. 우바이다울라, 바얀차르, 마훔드 샤, 하산 호자 등도 주요 직책에서 활동했다. 반면 한족 관료들은 행정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또한, 몽골 상인들과의 관계가 강화되어 기독교도와 무슬림 상인들은 부역 의무를 면제받았고, 정부는 이들이 몽골 귀족에게 사치품(тансаг)을 공급한 대가를 보장해주었다.[11] 예순 테무르 본인은 궁정의 사치를 비판하기도 했는데, 특히 백성들이 굶주리는 상황에서 외국 상인들이 수입한 값비싼 보석을 고가에 거래하는 행태를 지적했다.
종교적으로는 티베트 불교 라마승들의 월권 행위가 문제가 되었다. 일부 라마승들은 황금 패지를 이용하여 지방을 돌아다니며 민가에 머물고 주인을 내쫓는 등 행패를 부렸다.[33][13] 백성들의 불만이 커졌지만, 예순 테무르는 몽골인과 라마승들의 반발을 우려해 처음에는 소극적으로 대처하다가 결국 라마승의 중국 방문을 금지했다.[33][13] 또한 몽골의 전통적인 텡그리 신앙을 소홀히 하여 몽골 고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책과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33][13]
외교적으로는 1326년 킵차크 한국(금장 칸국)의 우즈베크 칸이 표범 가죽, 금, 은, 비단 등을 조공으로 보내왔고,[12] 예순 테무르는 이에 답례하며 킵차크 칸국에 대한 정벌 시도를 중단하고 우즈베크 칸의 권위를 인정했다.
재위 기간 동안 자연재해도 잇따랐다. 1324년에는 지진, 폭우, 가뭄, 황충 피해가 있었고, 개기 일식과 혜성 출현으로 민심이 불안해졌다.[23] 평장정사 장규는 테크시 일파 잔당 처벌, 궁정 내 승려와 도사 추방, 관료 축소, 광둥에서의 진주 채취 중단 등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4] 1327년에도 지진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울라트 샤를 중심으로 한 권신 세력과 무종계 왕공 및 한인 집단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예순 테무르 사후 발생한 양도내전(兩都內戰)의 배경이 되었다. 예순 테무르는 치화 원년(1328년) 정월, 대도 인근 통주(通州)에서 사냥 중 병을 얻었고, 병세가 악화된 상태로 여름 수도 상도로 이동했다가[25] 그곳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사망 시점에 대해서는 7월 10일[25], 8월 6일(알탄 톱치 기록), 8월 15일[13] 등 여러 기록이 있으며,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후 반대 세력의 신속한 쿠데타 진행 때문에 암살설도 제기된다.[26]
예순 테무르가 사망하자 무슬림 측근 다울라트 샤와 카툰 바부칸은 그의 어린 아들 라기바흐를 칸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카이산계를 지지하는 세력이 이에 반발하여 '두 개의 수도 전쟁'(천력의 내란)을 일으켰고, 라기바흐 정권은 3개월 만에 투그 테무르에게 패배하며 붕괴했다.[26] 예순 테무르는 사후 정권 붕괴로 인해 방계 황제로 간주되어 한족식 묘호나 시호를 받지 못했다.
2. 5. 사후
예순테무르는 기련곡(起輦谷)에 장사되었다. 그의 사후 1328년 8월 4일, 첨추밀원사 엘테무르, 안서왕 아라트나시리(阿剌忒納失里) 등 17명은 군사를 이끌고 궁정으로 들어가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평장정사 우베이둘라(烏伯都剌), 중서성좌승 타타(禿禿), 참지정사 왕사희(王士熙) 등을 체포하여 투옥하고, 당시 강릉에 머물고 있던 원 무종의 아들 투그 테무르를 찾아가 옹립하였다. 이에 투그 테무르는 강릉에서 대도 근처로 이동했다.엘테무르 등이 투그 테무르를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황태자 아리가박은 상도로 가서 제위를 계승했다. 1328년 10월 3일, 황태자 아리가박은 다울라트 샤 등의 추대를 받아 칸으로 즉위했으며, 시호는 흠인대효황제(欽仁大孝皇帝), 묘호는 진종(晉宗)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1328년 10월 16일, 아리가박 지지 세력과 투그 테무르 지지 세력 간에 내전이 발생했다. 이 내전에서 엘테무르 등이 승리하여 아리가박은 폐위되었고, 원 무종의 아들인 투그 테무르가 칸으로 즉위하였다(원 문종). 이후 예순테무르의 위패는 태묘에서 추방되었고 그의 묘호와 시호 역시 추탈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공식 묘호 대신 재위 후반기 연호인 '태정'(泰定)을 따서 태정제로 불린다.
3. 정책
지지 기반이 취약하다는 약점을 안고 즉위한 태정제는 칸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지지 세력 확보에 주력했다.
그는 중국 황제로서 화남 지방 민중의 지지를 얻고자 통치 초기부터 전통적인 유교에 관심을 보였다.[27] 그러나 실제 태정제의 궁정에서 요직을 차지한 이들은 중국인 사대부 계층이 아닌, 즉위 이전부터 그의 측근이었던 무슬림과 몽골 귀족들이었다. 좌승상 다우라트 샤 외에도 우바이드 울라와 바얀차르 등 두 명의 무슬림이 원나라 국정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군사 분야는 무함마드 샤와 하산 호쟈 등이 관장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화남의 남인들은 요직에 거의 등용되지 못하여 태정제 정부 내에서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또한, 태정제의 통치 아래에서 무슬림과 서방 기독교 상인들은 세금 감면 혜택을 받았다. 이들은 몽골 귀족에게 유럽과 아라비아 등지에서 들여온 사치품을 판매하며 태정제 재위 기간 동안 막대한 이익을 축적했다.[28]
4. 가족 관계
'''조부모'''
- 조부: 진금(眞金)
- 조모: 코케진(闊闊真, 바이람 에그치)
'''부모'''
- 아버지: 감말라(甘麻剌, 1263년 ~ 1302년 2월 8일) - 진금의 아들. 사후 '''인효광성 황제'''(光圣仁孝皇帝)로 추존되었다.
- 어머니: 부얀켈미슈(普顏怯里迷失) - 콘기라트부 출신. 사후 '''선의숙성 황후'''(宣懿淑圣皇后)로 추존되었다.
'''황후 및 비'''
- 바부칸 황후(八不罕) - 콘기라트부 출신. 올찰(斡留察児)의 딸.
- 이련진발라 황후(亦怜真八剌皇后)
- 사다발라 황후(撒答八剌皇后) - 수녕공주(Princess Shouning)의 딸.
- 비한 황후(必罕皇后) - 콘기라트부 출신. 마이주칸(買住罕)의 딸.
- 수가다리 비(速哥答里) - 콘기라트부 출신. 마이주칸(買住罕)의 딸.
'''자녀'''[22]
5. 연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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